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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독서

[정지혜의 빨간약]피해 주지 말고 시위해라?…‘장애인 지하철 시위’ 논란을 보며

by sperantia 2022. 7. 10.

거주환경 중 교통 편의성을 꽤 중시하는 터라 서울역 근처, 광화문 인근 등에서 여러 번 자취한 경험이 있다. 주말이면 열리던 각종 도심 집회가 나의 생활반경에 들어오자 짜증이 밀려왔다. 버스가 오지 않고, 약속 시간에 늦어 사정을 설명해야 하고, 소음에 민감한 편인데 커다란 구호와 꽹과리 소리를 피할 수 없는 휴일이라니. ‘시위를 하더라도 주변에 피해는 안 줘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분명 했던 것 같다.

그랬던 사회 초년생 시절을 지나 수년이 흐르는 동안 알게 된 것이 있다. 나의 일상을 뒤흔들 정도의 소음 앞에서야 비로소 시위자들이 외치는 ‘문제’를 바라보게 됐다는 사실이다. 내가 몰랐던 문제로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내가 평범하게 누리는 일상, 숱한 그 보통날 동안 저들은 ‘지워져’ 있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선택은 체념이거나 투쟁이거나. 요란한 시위를 통해서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이들은 일주일 중 6일 동안 ‘없는 듯이’ 체념하고 살다가 주말에 하루 나와 ‘내 말 좀 들어달라’고 투쟁하고 있었다. 장애인 시위도 마찬가지다. 비장애인들이 불편함 없이 출퇴근 하던 그 많은 나날 ‘체념하고 숨어 지낸’ 장애인들이 단 며칠 동안 쏟아지는 비난을 감당하며 출근길 지하철에 탑승했다.

여기에 대고 ‘나의 불편함과 피해’만 해소돼야 한다는 건, ‘타인에 피해는 주지 말고 시위하라’는 건 조금 가혹하다. 여전히 엘리베이터가 미설치된 서울시내 지하철 역사가 30개에 이르고, 장애인 권리보장 관련 예산은 후순위로 밀리기 일쑤다. 장애인이 살기 힘든 사회일수록 장애인이 잘 눈에 띄지 않고, 그래서 그들의 표심이나 의사가 잘 반영되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 구조를 유지해 온 일상에 머물며 구조를 바꾼다는 건 쉽지 않다. 장애인 시위가 유독 거칠어 보이는 ‘비일상성’을 띄게 되는 이유다. 물론 이 또한 비장애인의 시선에서다.

장애인들이 출근길 지하철을 탈 엄두도 내지 못하고 비장애인의 삶을 방해하지 않으며 지냄으로써 우리가 누린 편안함이 무엇이었는지를, 역설적으로 ‘출근길 지하철 시위’를 통해서나 알 수 있었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누구의 불편함은 당연하고, 다른 누구의 불편함은 절대 침해돼선 안 될 가치인가? 거기에 우선순위가 필요한가? 그렇다면 이는 명백히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사회다.

◆‘시위’에 대한 이해 여전히 부족한 사회

시위는 무엇이고, 대체 왜 하는 걸까. 늘 시위에 나서는 사람들은 누구이고, 시위할 것이 특별히 없는 삶을 사는 건 누구이며, 시위에 갈 때 신변에 두려움을 느껴 차마 대문을 나서지 못하는 이는 또 누구일까. 이들 사이에는 정말 아무런 권력의 차이가 없을까. 이제는 좀 더 본질적 물음을 던질 때다. 시위 참여자의 발언 하나, 시위 방식에 대한 지적이 정말 가장 우선적으로 제기돼야 할 사안이냐는 것이다.

애초에 시위의 본질은 ‘불편함’이다. 사회적 약자와 강자의 발언권, 생존권 등의 무게가 동일하지 않은 사회에서는 약자가 ‘좋은 말로 할 때’ 문제 해결이 쉽지 않다. 헌법상 사회적 약자든 강자든 똑같은 시민이지만 현실에서 막상 누리는 권리는 같지 않기 때문인데, 불평등한 사회일수록 이를 내면화하고 있어 구성원들이 그 격차를 잘 인지하지도 못한다. 일부 무책임한 기득권 통치자들은 “이미 권리 격차 같은 건 사라졌으니 약자에게 기회를 더 주는 건 특혜이자 불공정”이라며 대중을 호도하고 선동하기에 이른다.

이럴 때 의도적으로 거리를 장악하고, “이러한 문제가 있으니 내 말 좀 들어달라”고 소리치는 게 시위다. 진작 들어줬다면 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불편함을 야기하지 않는 한 주목받지 못하는 이들이 마지막으로 택하는 수단이 시위이며, 이러한 이유로 선진국에서는 모든 시민의 집회·시위할 권리를 중요하게 보장한다.

공론장에서 이들의 시위를 다룰 때 ‘방식의 합법성’에 불균형적으로 천착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부적절하다. 시위라는 개념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애초에 불편하라고 하는 게 시위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노력하는 사회라면 어느 정도의 불편함을 감수하며 갈 수밖에 없다. 이 불편함을 줄이려면 시위를 하는 이들을 단속할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을 마련하고 협상하며 ‘일을 진전시키라’는 압박을 정치권 등에 가하는 것이 성숙한 시민의 자세다.

법 또한 인간이 편의로 만든 시스템이지 만고 불변의 진리는 아니다. 특히 시위를 해야 하는 비일상적 상황에서는 ‘다른 시민을 불편하게 하니까’, ‘법을 어겼으니까’가 아니라 ‘얼마나 불편하게 하는 것이 적절한가’를 논의하는 정도가 바람직하다.

심지어 이번에 논란이 된 전장연 지하철 시위는 ‘비폭력 시위’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시위의 폭력성을 강조하는 표현들이 과도하게 사용됐다. 일부 정치권은 ‘시민을 볼모로 잡는’, ‘불법적 방식’이라는 표현을, 서울교통공사는 ‘스티커 전쟁터’라는 어휘를 사용했다. 또한 공통적으로 문제의 원인보다는 시위 방식과 시민 불편을 문제시하는 쪽에 집중했다.

특히 공사가 “시민 불편·갈등 심화 중, 더 이상 시위 그만”이라는 제목으로 ‘시민에 불편을 줘서는 안 된다’는 데 초점을 맞춘 보도자료를 낸 것은 장애인과 비장애인 시민 간 갈등을 유발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롭기 힘들다. 문제를 해결해야 할 정치권이나 지자체, 공공기관에 근본적 논의를 촉구하기보다 당사자의 입을 막는 데 급급하다는 인상을 준다는 점에서 아쉽다.

그 와중에 터진 ‘사회적 약자와의 여론전 맞서기’라는 대응 문건 사태는 공사의 신뢰도를 더욱 떨어뜨렸다. ‘개인의 일탈이지 공사의 공식 방침과 관련없다’는 해명을 포함한 사과문이 나왔지만, 정말 조직 내 분위기와 아무런 관련 없이 저런 정성스러운 발표 자료를 직원 혼자서 자율적으로 만들었다고 믿을 이가 얼마나 될지는 의문이다.

◆장애인을 정말 ‘동등한 시민’으로 본다면

‘장애인 이동권 시위에 왜 애꿎은 시민을 볼모로 잡느냐’는 주장은 어떨까. 출근길 지하철을 탄 비장애인들이 역사 엘리베이터 설치를 막은 것도 아닌데 왜 엉뚱한 데 와서 괴롭히냐는 것이다. 그런데 비장애인 시민들이 정말 애꿎기만 할까. 장애인도 비장애인도 똑같이 시민이고,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며 여론을 만드는 주체들이다. 거기에 정치권이 반응하는 측면도 있다. 사회가 만들어진 모양새에 모든 시민은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는 얘기다.

장애인들이 굳이 불편한 몸 이끌고 나와 비장애인의 따가운 시선과 날선 반응을 마주하기를 택한 것, 욕 먹을 것 뻔히 알면서도 매번 저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건 다른 선택지를 내밀지 못하는 사회 탓도 크다. 쉽지 않겠지만 그런 협상을 해 내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며 그럴 수 있는 정치인을 지지하는 것, 그렇게 하라고 압박하는 것은 시민의 역할이다. 장애인을 동등한 동료 시민으로 인정한다면 비장애인의 목소리가 먼저 향해야 할 곳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주체’여야 한다.

“할머니 임종 지키러 가야 한다”는 시민에게 장애인 시위자가 “버스 타세요”라고 한 발언에 순식간에 공분이 일어난 것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해당 발언자가 “나도 작년에 어머니가 대학병원에서 새벽에 돌아가셨는데 임종을 못 지켰다. 이용할 수 있는 교통편이 없었기 때문”이라며 연신 “죄송하다”고 한 것이 뚝 잘려나간 채 확산된 것도 문제지만, 여기에 분노한 많은 사람들은 이미 이 말의 진위를 확인할 의지도 없었다는 게 중요하다. 만만한 대상을 은연 중에 무시하는 심리에서 비롯된 ‘괘씸죄’는 정말 조금도 없었을까.

‘휠체어 탄 유튜버’로 활동 중인 ‘구르님’은 1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장애인에게 지하철보다 더 타기 힘든 버스를 타라고 했다면 화가 났을 것 같은데 비장애인에게 지하철 대신 다른 대안을 제시한 것이 그 정도로 반인륜적인 망언이었냐”고 항변하기도 했다.

사회로부터 동등한 권리를 부여받아야 할 시민이 이를 침해받았다면 그러기로 했던 ‘사회 계약’이 이미 깨진 것이기도 하다. 이 계약이 지켜지던 때와 똑같은 시민의 법 준수를 요구하는 것이 온당하냐는 지적도 가능하다. 시민이 의무를 다하기로 한 것은 그랬을 때 권리를 보장받는다는 사회 계약이 성립하기에 유지될 명분을 갖는다.

법과 질서 준수 요구의 명분을 잃어버린 사회는 이 명분을 되찾기 위해 실질적인 문제 해결에 나서고 당사자와 소통하려는 자세가 앞서야 한다. 이러한 노력에는 소홀한 채 ‘법을 지키라’는 말만 반복한다면 권리를 침해당한 시민으로서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당사자들의 투쟁…그냥 주어지는 건 없다

타인의 어려움을 완전히 이해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문제를 겪는 이들이 직접 목소리를 내고, 조금씩 이를 해결해가는 과정에서 사회가 성숙한다. 목소리내지 않으면 변화는 요원하다. 사회적 약자, 비기득권이라면 특히 그렇다. 완벽히 평등하고, 힘이 균등하게 나뉜 세상이 올 때까지 이들은 계속 권리 향상을 위해 외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를 두고 ‘약자가 반드시 선(善)은 아니다’ 같은 주장을 하는 건 한참 번지수가 틀렸다. 이것이야말로 과잉 반응이다. 시위에 나선 약자들은 자신이 ‘절대 선’이라고 주장하러 나온 게 아니다. 똑같은 기본권을 달라고, 마땅히 주어져야 하는 것이 아직 보장받지 못하는 불합리에 대해 따져묻고 정당한 청구를 하는 것이다. 출발선을 맞추는 기회의 평등조차 제대로 이루지 않고 주장하는 ‘공정과 상식’은 진짜가 아니다.

또한 당사자가 직접 싸워 얻은 것이 아닌, 기득권이 시혜적으로 내어주는 것은 유효기간이 짧고, 진정성도 약하다. 선거 등을 앞두고 임시방편으로 급한 불 끄자는 식으로 ‘주는 척’ 하는 눈속임이 많다. 기본적으로 기득권은 사회가 역동성을 띠고 변화하기보다는 이대로 안정되기를 원할 가능성이 크다. 주체들이 가만히 있으면 필요한 것이 없다고 생각해버린다. 자원과 역량은 한정돼 있기에 늘 우선순위를 정해야 하고, 누군가는 늘 밀려나는 것이 현실이다.

이를 이해한다면 당사자들의 투쟁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를 수 없다. 당사자의 눈을 가리고 입을 막는 것만큼은 사회 발전을 위해 가장 피해야 할 일이다. 이들이 사회적 약자라면 더더욱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당사자의 의견을 정책에 반영하는 노력과 진정성이 언제나 전제돼야 한다. 형식을 문제삼는 것은 그 다음에나 해야 하는 일이다.

◆정치의 본질은 ‘대결’ 아닌 ‘협력과 소통’

이번 장애인 시위 논란에 화력을 보탠 일등공신은 페이스북으로 여러 차례 관련 설전을 벌인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다. 이 대표의 발언은 무엇보다 이 사안을 ‘대결 구도’로 놓고 있는 인상을 강하게 줘 우려스럽다. 전장연이 지하철 시위를 잠시 중단한다고 밝히자 “전장연이 지하철 통행을 막아 시민들의 불편을 초래해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포기했다. 다수의 일반 시민들의 불편을 초래하는 방식이 비효율적이라는 것을 인지해서 다행이고 환영한다”고 한 데서 특히 이를 읽을 수 있다.

“대화와 토론을 통해 시위를 그만둘 방법을 찾아보자”는 것과 “불법적 시위를 그만두면 대화해보겠다”는 건 앞뒤만 바꿨지만 차이가 엄청나다. 어느 쪽이 정말 성숙한 정치일까. 후자를 발언한 이 대표에게 263만 장애인이 상처받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러한 행태가 문제의 핵심은 덮은 채 비기득권 약자 간 ‘오징어게임’식 싸움부터 부추긴다는 점에서 퇴행적이라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이 대표가 출근길 시민의 불편에는 적극 공감하면서 장애인 시민의 불편에는 포용적 태도를 취하지 않는 점도 지적받고 있다. 여전히 실재하는 장애인이 겪는 문제들,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 놓인 객관적 사실은 없는 취급하며 정치인으로서 시위 당사자들과 ‘싸우는’ 모양새가 적절하냐는 것이다. 여당 야당 할 것 없이 여러 동료 정치인들이 “그것은 정치인의 책무가 아니다”고 비판을 이어갔다. 이 대표에 대한 ‘장애인 혐오’ 논란이 지속되자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인수위원회까지 개입해 진화에 나섰을 정도다.

우리 사회는 정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동등한 권리를 누리고 있는가. 가장 중요한 건 사실 이 한 문장이다. 그리고 나면 여러 물음들이 따라온다.

사회에 만연한 차별과 혐오의 시선을 못 견뎌 숨어 지내야 하는 장애인들에게 ‘시위라는 특수 상황’에서마저 비장애인과 동등한 의무를 요구할 수 있는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장애인이 겪는 불편함을 ‘어쩔 수 없고 당연한 것’이라 여기진 않았을까. 문제를 겪는 당사자도 아니면서 시위를 하는 이의 문제제기가 ‘떼쓰기’에 불과하다고 손쉽게 확신하는 건 오만과 편견이 아니었을까. 저 시위가 억지라고 판단할 권리가 나에게 정말 있을까. 시위의 방식을 지적하기 전에 가진 것 없고 힘 없는 자의 ‘점잖은 외침’에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들은 척을 해 왔을까.

 

 

피해 주지 말고 시위해라?…‘장애인 지하철 시위’ 논란을 보며 [정지혜의 빨간약] (naver.com)

 

피해 주지 말고 시위해라?…‘장애인 지하철 시위’ 논란을 보며 [정지혜의 빨간약]

거주환경 중 교통 편의성을 꽤 중시하는 터라 서울역 근처, 광화문 인근 등에서 여러 번 자취한 경험이 있다. 주말이면 열리던 각종 도심 집회가 나의 생활반경에 들어오자 짜증이 밀려왔다. 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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