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블 코인에 대한 미국 정부의 압박이 점점 구체화되는 분위기다. 재닛 옐런 미국 재무부 장관은 지난 7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에 위치한 아메리칸 대학교 강연에서 "스테이블 코인은 불법 금융, 사용자 보호, 시스템적 위험 야기 등의 다양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날 옐런 장관은 스테이블 코인의 문제점을 강조하면서 종합적인 규제 필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아울러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는 일종의 금융 혁신이라고 치켜세웠다. 아직 CBDC를 직접 발행할지 여부에 대해서는 결정하지 않았지만, 일단 2023년 내로 미국 결제 시스템 내에서 연중무휴 실시간 결제가 가능한 페드나우(FedNow)를 출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CBDC에 무게를 실으면서 민간 스테이블 코인을 누른다는 계획으로 보인다. 과거 막연히 스테이블 코인에 대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경종을 울리던 수준에서 대응이 점점 입체적인 모양새를 갖춰가고 있다.
상위 5개 스테이블 코인 시가총액, 2년 새 24.7배↑
스테이블 코인은 '1개=1달러' 식으로, 법정통화 가치와 연동되는 콘셉트를 가진 코인들을 말한다. 이 코인들은 일반 통화처럼 비교적 가치 보존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크립토 업계 전반에 국경을 초월해 유동성을 불어넣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현재 기준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곳은 암호화폐 구입 대금이다. 크립토 마켓 데이터 분석 기업인 크립토컴페어(CryptoCompare)의 지난해 말 자료에 따르면, 비트코인 거래 대금 중 스테이블 코인인 테더(57.28%)가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미 달러화로 비트코인을 직접 구매하는 비율은 12.41%에 불과했다. 스위프트 등 속도가 느리고 수수료가 비싼 국제 통화 송금망을 거치지 않고도 이더리움이나 BNB 체인 같은 블록체인 네트워크를 통해 지갑 간 전송이 가능하기 때문에 실제 송금용으로도 자주 활용된다.
스테이블 코인은 그 설정만 놓고 보면 기존 금융의 요구불 예금이나 머니마켓 펀드(MMF)와 상당히 유사하지만 지금까지는 이렇다 할 만한 정부 차원의 규제를 받지 않았다. 거래 규모 자체도 제한적이었을 뿐더러 아직 대부분의 국가에서 암호화폐를 본격적인 금융의 영역으로 받아들이길 꺼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크립토 데이터 사이트인 코인게코에 따르면, 8일 기준 달러화 기반 스테이블 코인 상위 5개의 시가총액은 약 1768억달러(약 217조원)에 달한다. 2년 전 시가총액(71억3702만달러)에 비해 24.7배 불어난 수치다. 그만큼 많은 달러가 실시간으로 스테이블 코인에 묶여있다는 의미다.
미국 정부가 우려하는 상황은 명확하다. 현재 스테이블 코인 발행 주체는 모두 민간 기업인데, 규제가 없기 때문에 이들 발행사들이 고객 요청이 있을 때 스테이블 코인을 달러화로 환매해줄 준비 자산을 충분히 보유하지 않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대규모 부실이나 뱅크런 등의 문제가 생길 경우 크립토 영역 뿐만 아니라 전체 신용시장의 안전성을 해치고 금융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다. 옐런 재무부 장관 역시 이날 강연에서 지난해 6월 벌어진 스테이블 코인 타이탄(TITAN)의 뱅크런을 거론했다. 타이탄은 원래 개당 1달러를 추종하도록 만들어진 스테이블 코인인데, 6월15일부터 가격이 치솟기 시작해 개당 63달러를 찍은 후 급락해 0달러가 됐다.
미국은 비교적 최근인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이미 한 차례 날벼락 같은 뱅크런을 경험한 바 있다. 이후 만들어진 은행 건전성 기준인 바젤Ⅲ도 이제 본격적인 도입을 앞두고 있다. 이런 상황에 금융 당국의 규제를 제대로 받지 않는 스테이블 코인의 위험성이 높아져가는 상황 자체가 달갑지 않을 것이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옐런 장관, 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Fed) 의장 등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스테이블 코인 규제 관련 발언의 강도가 점점 강해지고 있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미국의 ‘와일드캣 스테이블 코인’ 길들이기…투자 변수 될수도?
앞으로 이 일은 어떻게 진행될까. 이와 관련해서는 지난해 7월 미 연준 이사회 의원인 제프리 장(Jeffery Zhang)과 예일대 교수 게리 고튼(Gary B. Gorton)이 발표한 '길고양이 스테이블 코인 길들이기(Taming Wildcat Stablecoins)’라는 논문에서 대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 논문은 미국 정부가 스테이블 코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해 다음의 세 가지 선택지를 제시하고 있다.
1. 스테이블 코인 발행사들을 은행으로 취급하고 은행과 동일한 규제(예금보험 등)를 적용한다.
2. 스테이블 코인 발행사들이 미국 국채나 중앙은행 지급준비금 등을 통해서 스테이블 코인을 발행하게 하고 그 액면가를 1:1로 보증하도록 강제시키는 법을 제정한다.
3. 중앙은행이 직접 디지털 화폐를 발행하고 민간 스테이블 코인에는 과세를 해서 시장에서 서서히 배제시킨다.
이 논문이 주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문제의 해결을 미국의 역사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논문 제목에 쓰인 '와일드캣(wildcat)'은 1816년에서 1863년 사이 미국에서 운영됐던 재정건전성이 나쁜 주 은행(State bank)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당시 이런 와일드캣 뱅크(wildcat bank)들이 저당권, 채권 같은 환금성이 낮은 유가증권을 담보로 가치가 보장되지 않는 자체 화폐(bank note)를 남발해 인플레이션을 초래하는 등 금융 질서가 어지러웠다고 한다.
와일드캣 뱅크들의 화폐 유통은 1863년 미국 내 모든 주 은행들에 연방 법률을 적용하고 모든 은행권을 국채를 담보로만 발행하라는 내용의 전국은행법이 생기면서 중단됐다. 그러니까 지금의 스테이블 코인은 당시 와일드캣 뱅크들이 발행하던 은행권과 비슷한 존재이고, 당시와 비슷한 해법으로 시장 안전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게 이 논문의 시각인 셈이다.
옐런 장관도 이날 이 와일드캣 뱅크 은행권 사례를 짚었다. 그는 “오늘날 통일된 통화는 경제 성장과 안정에 분명한 이점을 보여주고 있다”며 “디지털 자산에 대한 우리의 접근은 이러한 이점을 이해한 상태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크립토 업계 일각의 낙관적인 사람들은 뭐가 되었건 스테이블 코인에 규제가 도입되면 기존 금융시장에 편입되는 셈이니 크립토 시장에는 좋은 일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와일드캣 뱅크 사례를 보면 투자자 입장에서 그렇게 일방적으로 해석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시장에 없던 규제가 들어오면 장기적으로는 좋겠지만 단기적으로는 우선 과잉 상태였던 유동성이 잡히고, 일종의 거품이 줄어드는 과정을 거칠 가능성도 상존하기 때문이다. 당분간 미국 금융당국의 입을 주시해야 하는 이유다.
미국의 스테이블 코인 길들이기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 CoinDesk Korea 신뢰 그 이상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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