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적인 블록체인 기술 구현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 블록체인이 속해 있는 범주를 정확히 분별해야 한다. 범주에 착오가 생기면 해당 블록체인을 오해하게 될 뿐만 아니라 그 오해 때문에 자신도 속고 남도 속이는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먼저 범주가 무엇인지부터 제대로 이해하고 가야 하겠다.
‘범주(範疇)’라는 어려운 말은 ‘홍범구주(洪範九疇)’라는 더 어려운 말의 축약이다. 홍범구주는 ‘9개 조항(九疇)의 큰 법(洪範)’이라는 뜻으로, 중국 하(夏)나라 우왕(禹王)이 남겼다는 정치 이념을 가리키며, 중국 고전인 <서경(書經)>에 등장한다. 하지만 ‘홍범주구’의 의미를 아무리 뜯어보아도 ‘범주’라는 개념의 진짜 의미는 드러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범주’는 서양어 ‘카테고리(kategoria, category)’의 번역어로서만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카테고리가 무슨 뜻인지 알아야 한다.
‘카테고리’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에서 비롯한다. 이 개념을 아주 간단하게 이해해 보자. 우리가 의사소통을 할 때는 양편이 서로 말이 아귀가 맞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동문서답을 하게 된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는데 ‘붉은 노을이 예쁘군요.’라고 답하면, 이 대화는 뭔가 이상하다. 성질을 물었는데(‘쟁반 위에 있는 사과가 무슨 색입니까?’) 양을 답해도(‘사과가 열 개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 이처럼 분류에 있어 가장 큰 부류를 전통적으로 ‘범주’라고 했고, 범주가 어긋나면 ‘범주 착오’라고 했다. 요컨대 분류할 때 어떤 것이 속하는 ‘곳’을 범주라고 이해하면 무난하다. (범주에 대한 조금 더 깊이 들어간 설명으로는, 이태수, “범주”, <철학과 현실> 1990년 가을호, 327~337쪽 참조.)
블록체인의 범주란 해당 블록체인 기술이 어떤 부류(class)에 속하는지와 관련된다. 구체적인 블록체인 기술들을 분류할 때 가장 큰 부류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 답은 블록체인을 ‘어떻게 분류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블록체인 기술 자체는 궁극적으로는 논리(프로그램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분류가 제멋대로 이루어져서는 곤란하다. 이 경우 어떻게 해야 적절하고 적합하게 분류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그간 가장 많이 사용되던 분류 방식은 ‘읽기’와 ‘쓰기’ 각각의 권한에 따른 것이었다. 다니엘 드레셔에 따르면(Step 23 참조), 어떤 블록체인에서 ‘읽기’ 권한이 모두에게 열려 있으면 ‘퍼블릭(public)’, 제한되어 있으면 ‘프라이빗(private)’으로 각각 분류되며, ‘쓰기’ 권한이 모두에게 열려 있으면 ‘비허가형(permissionless)’, 제한되어 있으면 ‘허가형(permissioned)’으로 각각 분류된다. 이 분류 방식에 따르면 블록체인은 네 가지 범주를 갖고 있다. ‘퍼블릭-비허가형’, ‘프라이빗-비허가형’, ‘퍼블릭-허가형’, ‘프라이빗-허가형’이 그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블록체인에서 중요한 것은 우선적으로 ‘쓰기’ 권한이며, ‘쓰기’야말로 블록체인의 유지 및 보강과 관련된 기능이다. 이 점에서 ‘읽기’와 관련된 권한 구분인 ‘퍼블릭’과 ‘프라이빗’은 불필요하거나 기껏해야 2차적인 구분이다. 또한 용어 자체만 놓고 보면, ‘퍼블릭’과 ‘프라이빗’은 각각 ‘공개’와 ‘비밀’이라는 뜻을 갖고 있기에, 전자가 공공성을 갖는 반면 후자가 짬짜미와 관련되는 것 같다는 인상을 풍긴다. 하지만 이런 인상은 해당 블록체인의 기술적 본성과는 무관하며 사회적 선입견에서 비롯되었다. 이 두 가지 이유에서 ‘퍼블릭’과 ‘프라이빗’은 블록체인의 범주 구별에 적합하지 않다.
출처: https://coinrevolution.com/what-is-the-difference-between-public-and-permissioned-blockchains/
그래서 나는 미국 국립표준기술원(NIST)의 보고서 '블록체인 기술 개관' (이하 ‘개관’으로 약칭)이 채택하고 있는 분류 방법을 따르는 편이 간결하면서도 적절하다고 본다. 아마도 ‘개관’이 ‘프라이빗’과 ‘퍼블릭’이라는 구분을 도입하지 않은 것도 내가 앞서 지적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개관’에 따르면, 블록체인 네트워크를 누가 유지하느냐를 기준으로 해서, ‘누구라도 새 블록을 공표할 수 있다’면 ‘비허가형’ 블록체인, ‘특정 이용자만 블록을 공표할 수 있다’면 ‘허가형’ 블록체인으로 구분된다. ‘비허가형’은 누구라도 참여할 수 있는 ‘공개 인터넷’과 비슷하며, ‘허가형’은 통제 하에 있는 ‘기업 인트라넷’과 비슷하다.
‘개관’에서 언급하고 있는 ‘비허가형’ 블록체인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비허가형 블록체인 네트워크는 블록을 공표하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며, 그 어떤 권위로부터의 허가도 필요 없는 탈중앙화된 원장 플랫폼이다. 비허가형 블록체인 플랫폼은 종종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이며, 다운로드를 원하는 누구라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누구라도 블록을 공표할 권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공표된 블록들 안에 이 거래를 포함함으로써) 누구라도 블록체인 안에 거래를 발생할 뿐 아니라 블록체인을 읽을 수 있다.”
이런 개방성 때문에 악성 이용자가 자신에게 이익이 되도록 블록을 생성하려고 시도하는 일이 있게 되며, 따라서 이를 막기 위한 선제조치가 필요하게 된다(이와 관련해서 뒤에서 ‘합의 프로토콜’에 대해 설명할 것이다). 이 조치의 핵심은 악성 사용자를 막는 이용자에게 네트워크를 생성 유지하는 대가로 보상을 지급하는 것이다. 보상의 방식으로는 암호화폐가 사용된다.
대표적인 비허가형 블록체인이 ‘비트코인(Bitcoin) 네트워크’이다. 비트코인 네트워크에서는 이 네트워크를 구동하기 위해 필요한 표준 프로그램(‘비트코인 코어 클라이언트’)을 자신의 컴퓨터에 설치한 이라면 누구라도 참여할 수 있다. 장소가 어디이건, 프로그램을 설치한 사람이 누구이건, 설치한 컴퓨터가 어떤 종류이건 상관없이 평등하게 비트코인 네트워크의 참여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네트워크는 누구에게라도 열려 있기 때문에 네트워크를 이용해 사익을 취하려는 악성 이용자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네트워크가 생성 유지되면 이용자 모두가 이익을 누릴 수 있지만, 이런 경우에 반칙을 하면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어, 결과적으로는 네트워크가 붕괴되고 이용자 모두가 손해를 보는 이른바 ‘공유지의 비극(Tragedy of the Commons)’이 생겨나게 되리라는 것은 쉽게 예측된다. 마을 주민이 누구나 풀을 뜯을 수 있는 공동 목초지는 더 많은 양에게 풀을 뜯기게 하려는 주민들에 의해 금세 고갈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비트코인 네트워크는 이런 일을 예방하기 위해 나름의 내적 인센티브를 마련해 놓고 있다. 즉, 악성 이용자가 틈입하지 못하게 열일함으로써 네트워크에 기여하는 이용자에게 꽤 큰 보상을 지급하는 것이다. 그 보상으로 지급되는 암호화폐가 ‘비트코인(BTC)’이다. 네트워크의 이름과 암호화폐의 이름이 같지만, 가리키는 바는 다르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암호화폐 비트코인은 비트코인 네트워크 안에서만 통용될 수 있으며, 네트워크 안에서 거래를 발생시키려면 비용으로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꼭 필요하다. 암호화폐 비트코인을 얻는 방법은 딱 두 가지밖에 없다. 네트워크에 기여해서 보상으로서 비트코인을 받거나, 기존 비트코인 소유자한테서 얻어야 한다. 후자를 위해서는 뭔가 유용한 자산(현금, 콘텐츠, 재화, 서비스 등)과 교환해야만 한다.
2018년 1월 18일, 블록체인을 주제로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군 토론이 있었다. ‘jtbc 뉴스룸 긴급토론 - 가상통화, 신세계인가 신기루인가’라는 제목의 토론은 이른바 ‘유시민 vs. 정재승’ 논쟁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이 토론의 쟁점 중 하나가 ‘암호화폐가 블록체인에서 필수적인가?’였다. 당시에는 이 물음의 답을 논리적으로 도출해내지 못했다. 블록체인의 범주 구분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답하면 이렇게 된다. 비트코인 같은 비허가형 블록체인 네트워크에는 네트워크 유지에 대한 보상으로서 암호화폐가 필수적이다. 만일 지급되는 보상이 없다면, 많은 비용을 들여가면서 네트워크를 유지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암호화폐는 네트워크 내에서 공유지의 비극을 해결하기 위한 필수적인 수단이다.
한편 허가형 블록체인에 관해 ‘개관’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허가형 블록체인 네트워크는 블록을 공표하는 이용자가 권위(이 권위가 중앙화되었건 탈중앙화되었건)에 의해 승인되어야만 하는 네트워크이다. 승인된 이용자만 블록체인을 유지하기 때문에, 읽기 접근을 제한하고 거래 발생자를 제한하는 것이 가능하다. 따라서 허가형 블록체인 네트워크는 누구든 블록체인을 읽게 허용할 수도 있고 승인된 개인에게 읽기 접근을 제한할 수도 있다. 한편 허가형 네트워크는 누구나 거래를 제출해 블록체인 안에 포함될 수 있게 허용할 수도 있고, 이 접근을 승인된 개인에게만 제한할 수도 있다. (...) 허가형 블록체인 네트워크는 종종 기관과 개인의 집단을 위해 배치되며, 통상 컨소시엄이라고 지칭된다.”
허가형 블록체인은 참가자에 제한을 둔다. 그런 점에서 사내 인트라넷 같다고 묘사된다. 이 범주는 과거 ‘프라이빗’ 블록체인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허가형 블록체인이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그 자체의 유용성에 있다. 바로 이 유용성이 참여 인센티브이다. 이용자들이 약간의 비용을 추렴해서 큰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네트워크는 충분히 유지될 수 있다.
대표적인 허가형 블록체인 네트워크가 리플(Ripple)이다. 리플 네트워크는 전 세계 은행들이 모여 실시간으로 자금을 송금하기 위해 사용한다. 리플 네트워크를 이용할 경우 각 은행은 송금 시간과 비용을 극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네트워크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내부 암호화폐인 ‘리플(XRP)’을 쓰지만, 이는 단지 편의상 그렇게 하는 것일 뿐이며, 네트워크 유지를 위해 암호화폐 리플이 꼭 필요한 건 아니다. 이 경우 암호화폐 리플은 네트워크 리플을 더 잘 쓰기 위한 수단이지, 네트워크를 구동하기 위해 꼭 필요한 필수품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리플 네트워크에 대해 물어볼 수 있다. ‘암호화폐가 블록체인에서 필수적인가?’ 답은 ‘아니오’이다. 암호화폐가 있으면 조금 더 편리하지만, 없어도 충분히 다른 방식으로 이용 가능하다. 그러니 앞서 언급한 저 토론회가 얼마나 즉흥적이었는지, 또는 블록체인에 대한 당시 한국 사회의 이해 수준이 얼마나 초보적이었는지, 거듭 말해 무엇하랴.
특정 블록체인의 범주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좀 더 언급할 기회가 있겠지만, 범주 착오가 생기면 나에게도 남에게도 손해이다. 참고로, 비트코인을 비롯해 이더리움(Ethereum), 이오스(EOS), 스팀(STEEM) 등이 비허가형 블록체인의 대표이며, 리플과 하이퍼레저 패브릭(Hyperledger Fabric)을 비롯해 ICO(Initial coin offering, 초기 코인 공개)를 통해 자금을 모집한 거의 모든 블록체인이 허가형이다. 허가형 블록체인에서 통용되는 암호화폐(코인, 토큰 등)가 네트워크를 위해 꼭 필요한 걸까, 아니면 사업 주체의 사익을 위해 필요한 걸까, 혹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 필요한 걸까? 나는 이 물음에 대해 진심 어린 답을 듣고 싶다. 이 물음에 정확히 답하지 못한다면,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한 사회적 활용은 호응을 얻기 어려울 것이다.
암호화폐는 (허가형) 블록체인에서 필수적인가? - 뉴스톱 (newstof.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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