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는 수세기 동안 러시아, 오스트리아, 폴란드 등 주변국들로부터 전략적·산업적 요충지로 여겨졌다. 최근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가입을 두고 러시아와 충돌하고 있다. 우크라니아는 러시아 군대가 침공할 수 있다고 알려졌던 지난 16일을 ‘단결의 날’로 선포했다. 이날 수도 키예프의 올림피스키 경기장에서는 시민들이 200m 길이의 국기를 들고 행진하는 행사가 열렸다. AP연합뉴스
연일 우크라이나가 주요 뉴스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 언론이 우크라이나 뉴스를 이렇게까지 많이 보도한 것은 처음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도된 지난 16일 다행히 침공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고조된 위기는 아직 온전히 가라앉진 않았다. 우크라이나와 한국의 직접 교역량은 많지 않지만, 세계 각국이 긴밀하게 얽혀 있는 초연결 시대에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평화의 균열은 한국에도 직접적 영향을 줄 수 있다. 17일엔 우크라이나군이 자국 내 친러 반군이 있는 곳에 수류탄 공격을 감행했다는 러시아 언론의 보도가 나온 후 코스닥 지수가 급락하기도 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누리꾼들이 ‘현 우크라이나 사태 요약본’을 공유하며 다급하게 우크라이나 역사를 공부하고 있다.
마침 이 시기에 <유럽 최후의 대국, 우크라이나의 역사>라는 책이 나와 눈길을 끈다. 저자는 일본 외무성에 근무하며 주우크라이나 대사를 지냈으며 니혼대학 국제관계학부 교수를 역임한 구로카와 유지다. 구로카와는 1996년 우크라이나 대사로 임명되기 전에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유럽의 곡창지대’ 혹은 ‘농업국’이라는 단편적 이미지만 가지고 있었으며, 외무성에 근무하는 30년 동안 우크라이나에 대해 공부하려는 마음도 딱히 없었다고 털어놓는다. 하지만 실제 살아보니 “우크라이나는 곡창지대임에 틀림없었지만, 동시에 그것만으로는 단정 지을 수 없는 매우 복잡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대국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그는 자신이 우크라이나를 ‘발견’한 것처럼 독자들도 우크라이나를 발견했으면 하는 마음에 2002년 이 책을 썼다. 무려 기원전 8세기에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활동했던 스키타이족부터 소련 독립 이후의 2000년대 초반까지 방대한 역사를 다룬다. 중요한 국제관계와 내분의 양상을 모두 제시하는 것이 특징이다.
기원전 8~2세기 흑해 북쪽의 현 우크라이나 지역에는 스키타이인이 살았다. 역사학자 헤로도토스는 유목민족인 스키타이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들은 도시도, 성과 요새도 짓지 않고 이동할 때는 포장을 둘러친 마차에 가재도구를 실어 소나 말에게 끌게 했다. 그들이 이러한 생활 방식을 취하게 된 것은 스키타이의 토지가 목초로 우거지고 여러 하천이 흐르는 평원이기 때문이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은 ‘유럽의 곡창지대’라 불리는 우크라이나 영토가 이때부터 비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헤로도토스가 남긴 다른 기록들에 따르면 스키타이인은 능란한 기마술이 특징인 용맹한 전사였는데, 침공해 들어오는 페르시아인을 격퇴한 기록도 남아 있다.
우크라이나 역사는 키예프 루스 공국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키예프 루스 공국은 882년부터 1240년까지 오늘날 동유럽 지역에 해당하는 키예프(현재 우크라이나의 수도 이름이 됐다)를 중심으로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일대에 존재했던 루스인들의 국가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모두 자신들이 키예프 루스 공국의 역사를 계승한 ‘직계 후계자’라고 주장한다.
러시아의 논리는 이렇다. 키예프 루스 공국이 멸망한 후에 우크라이나 땅은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왕국 영토가 됐고 나라 자체가 소멸해서 계승자가 없었으나, 키예프 루스 공국을 구성하던 모스크바 공국은 단절되지 않고 존속해 공국의 제도와 문화를 계승해 훗날 러시아 제국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반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논리는 이렇다. 15세기의 모스크바는 키예프 루스 공국의 지배 아래에 있던 비(非)슬라브 부족의 연합체일 뿐이며, 가혹한 전제 중앙집권 체제인 러시아·소련의 체제와 키예프 루스 공국의 체제는 전혀 다르므로 별개의 국가라는 것이다. 또한 우크라이나 역사가들은 1240년 키예프 함락 후에 한 세기 가까이 존속했던 ‘할리치나-볼린 공국’을 최초의 우크라이나 국가라고 평하며, 우크라이나 땅에도 키예프 루스 공국을 계승한 국가가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키예프 루스 공국의 정통 계승자 여부에 따라, 자기 나라가 1000년 전부터 이어온 영광의 역사를 가진 나라인지, 아니면 지금까지 러시아의 한 지방에 불과했던 단순한 신흥국인지를 가늠하는 국격에 관련된 중요한 문제”라고 설명한다.
14세기 중반 할리치나-볼린 공국이 멸망한 후 17세기 중반 코사크(준군사적 자치 공동체)가 우크라이나의 중심 세력이 되기까지 약 300년 동안 우크라이나 땅에는 우크라이나를 대표하는 정치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땅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세 민족으로 분화돼 언어도 제각기 다르게 사용했다.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왕국의 지배하에 놓였던 16세기 말에는 귀족의 힘이 강해지면서 자유로운 농민들 대부분이 영주의 농노가 되기도 했다. “서유럽에서는 농노가 사라지던 시대에 동유럽과 우크라이나에서는 농노가 출현한 셈”이다.
이후 수세기 동안 러시아, 오스트리아, 폴란드 등 수많은 국가가 우크라이나 땅을 탐냈다. 18세기 말 폴란드가 분할되고 튀르크족이 흑해 북안에서 물러난 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120여년간 우크라이나 영토의 80%는 러시아 제국, 20%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의해 지배된다. 1차 대전이 터졌을 때 우크라이나만큼 여러 나라들에 치여 유린당한 땅도 없었다. 볼셰비키 적군, 폴란드군, 루마니아군, 프랑스군이 우크라이나 땅을 둘러싼 세력들이었다. 1919년과 1920년의 우크라이나는 여러 세력의 충돌로 무질서한 내란 상태에 빠져 있었다.
1차 대전으로 러시아에서는 제정이 무너지고 소련이 탄생했다. 민족 자결의 원칙에 따라 구 러시아 제국의 지배 아래 있던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등 여러 국가들이 독립을 이뤘다. 우크라이나인은 유럽의 어느 민족보다 긴 시간 독립을 위해 싸웠지만, 이 시기에 독립에 성공하지 못했다. 저자는 당시 러시아 볼셰비키의 조직력과 레닌의 전략적 능력, 러시아 차르 정부하에서 오랫동안 억압돼 있던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와 낮은 인텔리 지도자의 비율 등을 원인으로 꼽는다. 1922년 소비에트연방이 정식으로 성립한 이후 70여년간 우크라이나는 연방의 한 부분이 됐다.
지연된 독립으로 우크라이나인들은 큰 시련을 겪는다. 저자는 “소련 초기 우크라이나 공산당은 상당히 자유롭게 자신들의 주장을 모스크바에 전달했고, 이를 관철시켰다. 하지만 스탈린의 권력 장악과 함께 우크라이나의 자치 영역은 좁아지고 결국 모스크바에 의해 완전히 통제돼 소련의 일개 행정 단위가 됐다”고 말한다. 스탈린은 공업화된 사회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한 5개년 계획을 실행하며, 1928~1932년 농촌의 우크라이나인들을 대거 공장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같은 시기 농민들을 토지에서 분리해 국영농장 중심으로 집단화를 시키는 ‘농업 집단화’를 추진했는데, 이로 인해 농업 생산량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1932~1933년에는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발생한다. 저자는 대기근은 인위적인 기근이며, 홀로코스트에 필적할 만한 제노사이드로 지적하는 학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한다. 하지만 소련은 공식적으로 이 기근의 존재를 부인하며, 은폐하려 했다.
우크라이나 독립은 소련 붕괴의 결정적 계기가 된다.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폭발 사고 등으로 소련 체제에 대한 불신이 우크라이나에서 터져나오고, 우크라이나어 복권 움직임이 일어난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89년 ‘페레스트로이카를 위한 우크라이나 국민운동’(약칭 루흐·rukh)이라는 조직이 결성돼 30만명 가까운 시민의 지지를 받으며 독립운동을 이끈다. 1990년 3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의 의회인 최고회의(라다)의 선거가 이뤄지면서 소련이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같은 해 8월24일 우크라이나 최고회의가 독립선언을 채택하고, 그해 말 폴란드·헝가리·미국·캐나다 등이 독립을 승인하면서 소련이 사실상 해체된다.
최근 와서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 가입하려는 우크라이나와 이를 저지하려는 러시아의 갈등이 부각됐다. 그러나 구로카와가 전하는 역사를 보면 오랜 세월 러시아로부터 독립된 국가로서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우크라이나인들의 모습이 분명히 보인다. 오랫동안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를 포함한 여러 강대국들의 전략적·산업적 요충지였기에 이 지역을 둘러싼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혀 있으며, 갈등 역시 끊이지 않는 것이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우크라이나와 일본의 역사적 교류와 공통분모를 다루며, 앞으로 우크라이나와의 교류를 더 넓혀나가자고 제안한다. 한국의 시민들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커진 관심을 기반으로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더 깊이 이해할 기회를 가져보면 어떨까.
러-우크라 사태 이해하려면, 우크라이나 역사를 보라… ‘유럽 최후의 대국, 우크라이나의 역사’ - 경향신문 (kh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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