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하루독서

깊게 본 우크라이나 비극과 극복의 역사…기아학살, 수용소, 부정부패

by sperantia 2022. 9. 4.

“다른 국가들에게 경고한다. 방해하지 말라! 방해에 대한 대응은 아주 신속하고 전무후무할 것이다”

지난달 24일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작전’을 선포했습니다. 러시아 군대는 전면전을 선포했고,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이우(키예프)마저 폭격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삶의 터전을 벗어나 해외로 탈출하는 사람들의 행렬들이 길게 늘어섰고, 전쟁터에서 총을 들고 신혼을 맞은 신혼부부와 민병대인 아버지와 헤어져 구조버스에 오르는 아이의 눈물어린 이별이 전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을 빠져나가는 버스에 오르기 직전 한 노인이 눈물을 닦고 있습니다./TASS연합뉴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갑작스런 사건’이 아닙니다.

홍석우 한국외대 우크라이나어과 교수는 현대 우크라이나 정치에 대해 “냉전 종식 이후 우크라이나는 세계 열강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확대하기 위해 싸우는 장이 되어갔다”고 설명했는데요.

1991년 소비에트 연방 해체 이후 우크라이나 내에선 지속적으로 러시아의 세력을 등에 업은 친러 세력, EU와 NATO 가입을 추진하는 친서방 세력 간의 갈등이 존재해왔습니다. 그리고 이는 유로마이단(2013~2014) 이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2014), 돈바스 전쟁(2014~현재) 등으로 이어져왔습니다. 이처럼 첨예한 갈등이 계속되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미국의 국제정치학자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열강이 충돌하는 ‘지정학적 중추국(Pivot state)’이라고 정의하기도 했습니다.

이번 레터의 소재를 우크라이나로 잡고서도, 어떻게 이 첨예하고 복잡한 문제를 다룰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지정학적이고 역사적인 사건들, 역학을 정리하는 것은 사안을 명확하게 바라보는데 도움이 됩니다.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정부와 세계에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것을 촉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지도 위의 화살표와 연표만으로는 담아내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레터에서는 그 작은 이야기들에 귀 기울여볼까 합니다.

이고르 투베리의 <우크라이나 이야기>, 안드레이 쿠르코프의 <펭귄의 우울> <펭귄의 실종>, 마샤 스크리푸치 <그러나 삶은 지속된다> 등을 읽었습니다.

■우크라이나 대기근과 수용소

우크라이나는 ‘유럽의 빵 바구니’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만큼 축복받은 비옥한 토양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노랗고 파란 국기도 널따란 황금 밀밭 위의 푸른 하늘을 상징한다는 말이 있죠.

그런데 1930년대, 이 풍요로운 국가에서 전체 인구의 무려 1/3~1/4에 이르는 사람들이 굶어 죽은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홀로도모르(우크라이나의 대기근-기근학살·1932~33)’입니다.

1차대전으로 제정 러시아 몰락 이후 1922년 우크라이나는 소비에트 연방의 한 부분에 속하게 되었는데요. 이에 굴하지 않고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독립을 위해 분투해왔습니다.

▶관련기사 : 러-우크라 사태 이해하려면, 우크라이나 역사를 보라… ‘유럽 최후의 대국, 우크라이나의 역사’(링크)

이에 스탈린은 1932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말살을 위한 정책 외에도 집단 농장화를 위해 대대적인 ‘우크라이나 옥죄기’에 들어갔습니다. 국경을 닫았고, 군사를 동원해 조직적으로 농가의 먹을 것들을 남김없이 빼앗았습니다. 당시 스탈린이 이 같은 만행을 저지른 것은 식량 확보보다는 농업 집단화와 농민들의 자립 의지를 꺾는 것에 큰 목표가 있었다고 합니다.(“홀로도모르는 우크라이나인들을 무릎 꿇게 하고 자신들의 땅에서 자신의 미래를 창조할 권리가 있다는 희망을 없애려는 시도였다.”-ANDRII SYBIHA)

위의 내용은 이고르 툰베리의 <우크라이나 이야기>를 바탕으로 홀로도모르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을 정리한 것인데요. 이 책은 우크라이나 작은 사람들의 역사를 훌륭하게 그려낸 그래픽 노블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우크라이나의 근현대사를 이야기할 때 홀로도모르를 결코 빼놓을 수 없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고르는 이 책을 쓰겠다고 결심한 계기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2009)에 나는 우크라이나에 있었다.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고, 그것을 그리기로 결정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나 역시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이 이야기들은 길에서 우연히 만난, 철의 장막의 품에 갇힌 채 태어나고 살아갈 운명을 가졌던 사람들의 진짜 이야기이다.”

우크라이나 대기근 당시 극도의 배고픔으로 인해 길거리에는 굶어죽은 자들의 시체를 볼 수 있었습니다.(왼쪽)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키예프)에 있는 홀로도모르 동상에 아이들이 참배하고 있습니다. 출처 위키미디어, 로이터

이 책에서 1928년생인 세라피마 안드레예프나는 1932년을 자신의 삶에서 가장 끔찍한 기억이라고 무표정하게 회상합니다. 군인들이 먹을 것을 모조리 가져갔습니다. 부모님은 하루종일 눈밭을 헤쳐 뱀을 잡고, 장터에서 말가죽을 사다 말려 굶주린 아이들에게 내내 씹게 했습니다. 심지어 강도들은 도랑을 파서 거기에 빠진 사람들을 잡아먹기도 했습니다. 1925년생 마리아 이바노프나는 대기근 당시 이웃집을 방문했다가 이웃 노인이 배가 부푼 채 굶어죽어있는 것을 봅니다.

당시 쓰여진 순찰 보고서에서 홀로도모르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1933년 3월 5일. 마예프스크 지역, ...손이 피로 물든 아이 두명을 보았다고 합니다. 7살 아이에게 무슨 일인지 질문하자, 방금 막 말을 잡아먹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썩어가는 고기 한조각을 보여주었습니다...14살 아이는 썩은 말의 구운 뼈를 먹은 뒤 끔찍한 복통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비소코폴스크 지역. 2월 16일, 자그라도프카에서 가난한 농부 가족의 12살짜리 아들인 젊은 니콜라이가 죽었습니다. 어머니 F와 이웃인 안나 S는 시신을 조각내 만든 음식을 함께 내놓았습니다. 시신은 몸 대부분이 사라졌습니다. 머리와 발, 어깨 한쪽, 손바닥, 척추, 그리고 갈비뼈 몇개가 없어졌습니다.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지역 합동국가정치보안부 대장 크라우클리스 보고서(이고르, <우크라이나 이야기> 재인용)

대기근 당시 이렇게 죽어간 사람이 무려 250~350만명으로 추정됩니다. 현재 우크라이나 동북부 하르키우에는 홀로도모르 희생자들의 무덤이 세워져있고, 키이우(키예프)엔 홀로모도르 소녀 동상이 세워져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11월 마지막주 토요일을 홀로도모르의 날로 정하고 매년 희생자들을 기려왔습니다. 우크라이나 대기근 당시 스탈린은 기근이 ‘사실무근’이라고 외치며 서방 기자들을 초청하기도 했는데요. 대기근의 진실을 파헤쳐 보도했던 가레스 존스라는 젊은 기자는 30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의문사합니다.

▶가레스 존스 기자 추모, 아카이브 페이지(영문·링크)

20세기 우크라이나의 아픈 역사는 이어집니다.

「아우슈비츠, 지옥의 끝」(마샤 스크리푸치, <그러나 삶은 지속된다> 수록작)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라는 이유로 1943년부터 종전까지 버케나우 수용소에 갇혀있다가 가까스로 살아난 작가 스테판 페텔리키의 회고록입니다.

얼핏 우크라이나와 나치 수용소가 잘 연결이 되지 않으실 수도 있을텐데요. 스탈린 치하 민족주의 말살 정책으로 인해 1928년 수많은 우크라이나의 지식인, 민족주의자들이 학살당했습니다. 이후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탄압받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독일이 소련 치하로부터 자신들을 해방해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우크라이나 독립’을 외쳤습니다.

하지만 나치는 우크라이나 및 슬라브인들을 ‘운테르멘셴(Untermenschen·노예로 만들거나 몰살시켜야 마땅한 저급 인간)’으로 딱지붙여 수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을 수용소에 잡아가둡니다. 이중에서도 민족주의자들이 제1타겟이 되었다고 하는데요. 하루아침에 수용소에 갇혀 이름대신 ‘154922’라는 번호를 받게 된 스테판 페텔리키 역시 이중 하나였습니다.

내가 아우슈비츠로 보내진 것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나는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위해 기꺼이 싸울 생각이었고, 필요하다면 투쟁하다가 죽을 각오도 되어있었다. 나 같은 사람들이 우크라이나를 위해 싸웠다는 이유로 수없이 아우슈비츠로 보내졌다. 그중 살아남은 사람은 소수였다. -스테판 페텔리키, 「아우슈비츠, 지옥의 끝」(마샤 스크라푸치 외, <그러나 삶은 지속된다> 중)

이 글은 1945년 종전과 함께 저자가 수용소에서 풀려난 것으로 끝을 맺고있습니다만, 이후 우크라이나는 소비에트 연방 소속 국가로 있다가 1991년 소련 연방이 해체되면서 그제서야 본격적인 독립 국가의 시작을 맞게 됩니다.

■소련 해체 이후, 황폐한 우크라이나를 걷는 펭귄

1991년 우크라이나는 바라던 독립을 맞았지만, 이곳에 갑자기 따뜻한 봄날이 찾아오진 않았습니다.

오랜 소련 치하 역사로 인해 우크라이나의 정치, 경제 상황은 극도의 혼란에 빠져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 세력으로 나뉘어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유명 정치인이나 기자 등이 하루아침에 타깃이 되어 죽어나가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우크라이나 작가 안드레이 쿠르코프의 펭귄 연작(<펭귄의 우울> <펭귄의 실종>)은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우크라이나의 혼란스런 정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소설입니다. 이 시리즈의 주인공은 소설가에서 프리랜서 기자로 전직한 빅토르, 그리고 그와 함께 사는 펭귄 미샤입니다.

<펭귄의 우울>의 주요 내용은 빅토르가 1995년 어느날 ‘수도뉴스’라는 큰 우크라이나 신문사에서 ‘십자가’라는 연재 코너 일거리를 얻으며 일어나는 일들인데요. 십자가 코너의 이상한 점은 살아있는 사람의 부고라는 것입니다. 빅토르는 직접 부고란에 실릴 사람을 결정해 기존 신문기사나 그에 대한 소식을 참고해 부고를 미리 써둡니다. 그런데 더 이상한 점은 만화 ‘데스노트’처럼 빅토르가 십자가에 적은 사람들이 줄줄이 죽어나갔다는 점입니다. 이후 빅토르는 기묘한 일들에 휩쓸리며 괴한, 어둠의 세력들에게 목숨을 쫓기게 됩니다.

빅토르는 그간 자신이 십자가에 썼던 인물들이 죽어나간 게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했지만, 편집장의 캐비넷에서 어떤 극비서류를 발견하며 자신이 해온 일이 살해 교사나 다름없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서류철에는 타자기로 친 서류가 따로따로 놓여 있었다. 자신이 최근에 쓴 ‘십자가’ 중에서 아르마뚜라 공장장에 관한 글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보았다. 왼쪽 상단 모퉁이에 결재가 되어 있었다. “승인 1996.2.14”와 흘려 쓴 사인이 있었다. 빅토르는 이 결재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결재가 어딘가 이상해보였고, 깜짝 놀란 그는 더 이상 두려움으로 몸을 떨지 않았다. ‘오늘이 겨우 2월 3일인데...’-안드레이 쿠르코프, <펭귄의 우울>

<펭귄의 우울>의 작중 배경은 1995년에서 1996년(레오니드 쿠치마 대통령 재임) 우크라이나 키이우(키예프)인데요. 당시 무수한 엘리트들이‘권력에 찍히는 순간 의문사 당한’ 우크라이나 상황을 우회적으로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는 꼭 95~96년에만 특정된 상황은 아니었는데요.

실제로 2000년 쿠치마 정권에서 우크라이나 프라브다의 창시자인 우크라이나 기자 게오르기 곤가제가 목 잘린 시체로 발견되고, 2004년 우크라이나의 유력 야당 후보 빅토르 유셴코는 대통령 선거 직전 다이옥신 테러를 당해 치명상을 입기도 했죠. 이후 결국 유셴코는 오렌지 혁명을 거쳐 대통령에 당선되지만 우크라이나를 사이에 둔 미-러 간의 ‘신냉전’ 기류는 날이 갈수록 짙어져만 갔습니다.

▶관련기사 : [기억할 오늘] 카세트 스캔들(11.28)

▶관련기사 : 미·러 대립 위험수위 ‘신냉전’ 징조

우크라이나 3대 대선을 앞두고 다이옥신 테러로 인해 얼굴 등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던 당시 야당 후보 빅토르 유셴코(왼쪽), 해당 선거에서 친러성향의 여당 후보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승리했으나 부정투표 의혹을 제기하며 오렌지혁명(2004)이 일어났고, 재선 끝에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오른쪽은 당시 쿠츠마 정권에 의해 살해당한 것으로 추측되는 우크라이나 기자 게오르기 곤가제 출처: 위키피디아

이 작품에서 빅토르는 결국 날이 갈수록 낯선 기후에서 쇠약해져가는 펭귄을 치료해주고 남극으로 보내주려고 합니다.

하지만 빅토르 자신이 그 다음번 ‘십자가’의 타깃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미샤 대신 남극으로 도피하는 내용으로 끝을 맺습니다.

속편인 <펭귄의 실종>은 남극으로 혼자 도망쳤던 빅토르가 버려둔 펭귄 미샤를 찾기 위한 ‘미샤 찾아 삼만리’를 그리고 있습니다. 빅토르는 펭귄을 찾기 위해 다시 키이우(키예프)로 돌아오는데, 미샤의 단서를 추적하던 중 이곳에서 정치인 세르게이 파블로비치를 만나 선거 공작원 역할을 하게 됩니다.

정치인 파블로비치는 빅토르에게, 잔혹하고 복잡한 우크라이나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한 ‘달팽이의 법칙’을 충고합니다. 파블로비치의 아래와 같은 말은 법이나 민주주의 질서가 아닌 ‘지붕’으로 돌아가는 우크라이나의 세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달팽이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달팽이의 법칙이라는 것을 지켜야 해. 들어보았나? 자네는 작은 달팽이야. 나는 좀더 큰 달팽이라고 할 수 있어. 자네에게는 조그마한 집이 있어야 하고, 나에게는 보다 크고 튼튼한 집이 필요하지[...]나는 두개의 머리를 가진 달팽이가 되고 싶었어[...]머리가 두개인 달팽이에게는 두개의 ‘지붕’이 있지...어두운 쪽의 보호와 정부 쪽의 보호가 함께있거든.”-안드레이 쿠르코프, <펭귄의 실종>(이하 동일)

빅토르는 곧 펭귄 미샤의 흔적을 따라 모스크바, 체첸으로 향합니다. 체첸에서 빅토르는 거대한 ‘용광로같은 것’을 관리하는 업무를 맡으며 미샤의 소재를 추적하는데, 그 용광로같은 것의 정체는 바로 ‘사설 화장장’이었습니다. 이곳에는 국적, 성별, 나이, 직업 불문 갖은 시체들이 애도조차 없이 한줌의 재가 되기 위해 실려옵니다. 심지어 살아있는 사람이 오기도 하죠. 사람들이 너무도 쉽게 죽어가는 이곳에서는 그닥 경악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펭귄 미샤를 데리고 있는 사람은 체첸 반군으로 추정되는 하차예프라는 인물입니다. 참고로 체첸 역시 1,2차 체첸전쟁(1994~2009) 등 아픈 현대사를 지니고 있는 국가입니다. 러시아 기자 안나 폴릿콥스카야는 체첸에서 벌어지는 러시아군의 만행을 취재했고, 2006년 모스크바에서 괴한의 총에 맞아 사망했습니다.

▶관련기사 : 러 청부살인 공포…“푸틴 정부·기업 갈등 배경”(링크)

체첸에서 만난 하차예프는 펭귄을 되찾으러 온 빅토르에게 말합니다.

“이데올로기나 독재를 완전히 자발적인 민주주의로 대치해야 해, 그렇게 되면 문제가 해결되지[...]자네들 러시아 사람들은 체첸 사람들에게 태어나면서부터 몸에 밴 자부심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전쟁을 시작했어. 자네들에게는 그러한 자부심이 없기 때문이지.”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당신들과 전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누구와 싸우나?” “아무하고도 싸우지 않습니다.” “그건 나쁜일인데...” 하차예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면 자기네들끼리 싸운다는 말이니까...”

빅토르는 결국 체첸에서 비쩍 말라버린 펭귄 미샤를 찾아 키이우(키예프)로 돌아오고, 다시 미샤를 펭귄들의 섬에 데려다주기 위해 함께 배에 오릅니다. 그 배에서 빅토르는 결혼을 하고 진정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펭귄에서 오렌지, 마이단으로

위에선 줄거리 위주로 정리하다보니 펭귄의 존재가 거의 드러나지 않았는데요.

이 펭귄 연작 시리즈 소설을 실제로 읽어내려가다보면 냉동 물고기와 물을 조용히 받아먹고, 작은 두 눈으로 빅토르를 바라보고, 말은 없지만 그의 말을 알아듣는 듯 하얀 털가슴을 그의 무릎에 부비는 펭귄의 애틋하고 위안이 되는 모습에 눈을 사로잡히고 맙니다.

등 뒤에서 부엌문이 삐걱하고 열렸다. 빅토르는 몸을 돌리면서 소냐일 거라고 생각했다. 열린 문 사이로 펭귄 미샤가 주인을 바라보았다. 1분 뒤 미샤는 빅토르가 발을 딛고 서있는 자신의 의자 쪽으로 걸어왔다. 이 의자는 미샤 거였다. 그의 그릇이 놓인 곳이다. 빅토르는 바닥으로 내려왔다. 미샤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미샤를 쓰다듬었다. “내가 너의 잠을 깨웠다면 미안해!” 그에게 속삭였다. “내가 어떤 일을 했는지 아니?” 펭귄은 작은 눈을 주인에게서 떼지 않고 헤네시 코냑의 냄새가 맘에 들지 않는 듯 고개를 왼쪽으로 조금 돌렸다. “나는 과거를 내다 버렸어!” 빅토르가 계속해서 속삭였다. “과거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빅토르에게는 미샤가 고개를 끄덕인 것 같았다. 즉 이해했다는 뜻이다. 이 사실은 그를 매우 행복하게 만들었다.

쿠르코프는 그간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펭귄’이 구소련 해체 이후 국가들의 혼란을 상징한다고 말했습니다. 원래 펭귄은 무리지어서, 추운 곳에서 살아야 합니다. 따뜻한 도시에 혼자 사는 펭귄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줄수는 있겠지만, 펭귄은 ‘우울’하고 쇠약해갈 수밖에 없죠. 두권의 펭귄 시리즈에서 빅토르의 가장 큰 동력이 펭귄을 남극에 데려다주는 것인 이유입니다.

펭귄 연작 소설을 쓴 우크라이나 작가 안드레이 쿠르코프와 펭귄(왼쪽). <펭귄의 우울> 영문판 표지. 이 작품에서 장례식장에 조문객으로 참여하는 펭귄의 이미지는 강렬한 상징성을 갖고 있습니다. 출처:랜덤하우스UK, 아마존

하지만 ‘펭귄의 우울’이 구소련 해체 이후의 무력감을 상징한다고 해서, 그 해결법이 소련의 영광을 다시 소환하는 것은 아닙니다.

소설 속 펭귄이 처음 빅토르에게 오게 된 계기는 1990년대 우크라이나의 경제 침체로 인해 동물원이 문을 닫으면서였습니다. 애초에 동물원에 있는 것조차 펭귄에겐 즐거운 일이 아닌 게 당연하겠죠. 이 때문에 과거 동물원에서 근무했던 늙은 펭귄학자(빠르빨르이)는 전재산을 모두 남극기지 연구소에 의탁하고, 빅토르는 사람들의 비웃음과 의아한 시선 속에서도 그 기묘한 ‘비효율적인 일(굳이 큰 돈과 수고를 들여 펭귄을 남극에 보내기)’을 계속해가는 것입니다.

즉, 작가는 펭귄을 남극으로 되돌려주는 것을 어찌보면 우크라이나 및 구소련 소속 국가들이 미래로 향하가 위한 전제조건으로 두고 있는데요. 이는 진정한 의미의 자립과 민주주의를 이룩하는 것을 뜻할 것입니다.

<펭귄의 실종> 중 체첸 사설 화장장에서 미샤를 그리며 보낸 나날에 대해 빅토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완충지대에 들어온 다음부터 그는 ‘어제’에서 ‘내일’로 넘어가는 중간 과정으로 ‘이날’을 살았다. 매일이 ‘이날’이었다. 빅토르에게는 ‘오늘’이 존재하지 않았다. ‘어제’에서 막 바로 ‘내일’로 넘어갔다. 어제 펭귄 미샤를 만나면서 처음으로 빅토르는 자유가 주어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자유가 ‘내일’ 올 것이다. 이곳에서의 ‘이날’은 구체적인 날짜와 요일을 상실하였지만, 한주일을 쉬는 날과 일하는 날로 구분하고, 선과 악이 존재하고, 모든 사람들이 정상적인 삶의 법칙을 기억하는 곳, 그리고 사람들이 그 법칙에 따라 생활하는 곳이 이제 멀지 않았다. 그곳에서는 ‘이날’이 비로소 ‘오늘’이 되면서 날짜와 요일을 갖게될 것이다. 달력에서 분명한 위치를 차지하고, 한달이나 한주의 시간범위 속에서 자기 자리를 갖고 있으며, 자신의 이름을 소유하고, 그 이름으로 특정한 사건이나 일이 일어난 시점을 역사에 기록할 수 있는 ‘오늘’을 만나게 될 때가 이제 멀지 않았다.

펭귄을 돌려보내는 것-즉, 과거로부터 벗어나 민주주의와 자립을 이뤄내는 것-을 통해 우크라이나는 ‘이날’에서 벗어나 ‘오늘’ 그리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000년대 이후 우크라이나 시민들은, <펭귄의 실종> 주인공 빅토르처럼 ‘미래’를 향한 발걸음을 계속해왔습니다. 대표적으로는 ‘오렌지혁명(2004)’과 ‘유로마이단(2013~4)’을 들 수 있습니다.

▶관련기사: 우크라이나, 대통령 퇴진 요구하며 수십만명 시위

▶관련기사: 우크라이나, 러시아를 막을 수 있을까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키예프)의 광장에 모여있는 유로마이단 시위대의 모습. 2014년 2월부터 하루에 수십명의 시위대들이 총격 등으로 인해 사망하며 분노는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윈터온파이어> 화면 갈무리

<윈터온파이어>(2015)는 2013년말부터 진행되었던 유로마이단 혁명 90여일의 실제 기록을 생생하게 담은 다큐멘터리입니다. 우크라이나 정부가 추진 중이던 EU 가입 협정을 전격 철회하고 러시아 차관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자 우크라이나 시민들은 이에 저항하기 위해 광장에 모였습니다. 초반엔 비교적 평화적인 분위기에서 진행되었으나 이후 국회에서 반시위법이 통과되고 2014년 2월부터 당시 야누코비치 정권은 티투쉬키라는 용역깡패 및 베르쿠트(특수부대)를 적극 동원해 대대적인 무력 진압을 시작했습니다. 이로 인해 시위 기간 총 103명의 우크라이나 시민이 사망했습니다.

시위 참여 중 사망한 시민들의 모습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의료진들. 무력 진압이 최고조에 달했던 2014년 2월 20일엔 이날 단 하루에만 47명의 시민이 사망했습니다. 다큐멘터리 화면 갈무리

결국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탄핵당하고, 시민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집니다. 다큐멘터리에서 한 유로마이단 시위 참가자는 “우리는 23년 동안 겉으로만 독립국가였지만 이제 많은 사람의 희생으로 진정한 독립국가가 됐어요”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가장 섬뜩한 것은 이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광장에 모여든 사람들의 환호가 점점 페이드아웃되며, 아래 글자들이 까만 화면을 조용히 메웁니다. 그리고 여기에 나열된 불씨들은 고스란히 오늘날로 이어집니다.

“광장 시위 몇 달 후, 경찰 특공대 베르쿠트 영구 해체. / 우크라이나 신임 정부 유럽연합 협정서 서명 / 야누코비치 러시아 망명 러시아 푸틴 대통령 허용 / 러시아 군대 파견해서 친러시아 분리주의자 지원 / 러시아, 우크라이나 남부 크림 반도 합병 / 친러시아 시위 우크라이나 동부로 확산 및 격렬한 전쟁(*돈바스 전쟁)으로 확대 / 2015년 봄까지 6천명 이상 사망”-다큐멘터리 <윈터온파이어> 마지막 자막

■맺음말

“우리를 묻어버리지 마세요. 우린 끝까지 싸워갈 것입니다.”

지난달 25일 삼프로TV에 출연한 올레나 쉐겔 한국외대 우크라이나어과 교수는 반복해서 힘주어 말했습니다. 그는 이날 우크라이나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20세기 초반의 소련 합병과 1932년 홀로도모르부터 시작해 굴곡어린 우크라이나의 역사와 현재까지 이어지는 우크라이나인들의 아픔을 이야기했습니다. 말을 쏟아내던 중 그는 여러번 목이 메였습니다.

당연하지만, 현 상황을 한마디로 정의내리기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일각에서는 젤렌스키의 ‘정치 무경력’을 지적하고( 링크 ), 누군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갖고 있는 소통능력( 링크 )과 “내게 필요한 것은 도피가 아닌 탄약”이라 말하는 그의 결사항전 정신을 높게 평가합니다( 링크 ). 그렇게 현재 많은 젊은이들이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모여들고 있습니다( 링크 ). 그러나 그간 전쟁의 징후가 있었음에도 전쟁을 막지 못한 지도층을 비판하는 주장( 링크 ), 피해를 막기 위해 ‘핀란드화’를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 링크 )도 나왔습니다. 러시아 측은 냉전 이후 러시아 서방과의 알력의 역사(NATO 동진 등)를 짚으며 울분을 터트리기도 하고( 링크 ), 그 반대 주장도 있습니다( 링크 ). 이 밖에도 수많은 의견과 주장, 사실과 프로파간다, 감정, 사건들이 뒤얽혀있습니다.

오늘 레터의 목적은 우크라이나의 아픔, 역사를 짧게 ‘한줄 요약’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이런저런 주장들이 있으니 뭐가 옳은지 판단할 수 없다고 행동을 미뤄버리기 위함도 아닙니다. 다만 역사에서 ‘국가 간’의 분쟁이 강조될 때 우리가 잊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연구자님들과 함께 한번쯤 되새겨보고 싶었습니다.

“우리를 공격하려 든다면, 당신들은 우리와 등이 아니라 얼굴을 맞대게 될 것입니다[...]우리는 서로 다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적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정직하고 평화적이고 조용하게 우리의 미래를 쌓아가고 싶을 뿐입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지난달 25일 연설에서‘러시아’가 아닌 ‘러시아인’을 상대로 호소했습니다. 이는 전쟁 상태의 한 국가의 수장이 하는 연설으로서는 굉장히 이례적인 말 걸기 방식이었습니다.

이번 레터를 위해 홀로도모르에 대한 이야기를 읽다 눈을 비비며 ‘극악무도한 소련’에 분개하던 즈음, 문득 소련 치하 죽음의 수용소에서 가까스로 살아나온 러시아 작가를 떠올렸습니다. 과거 소련의 영광은 기실 ‘소련인’들의 영광이 아니었습니다. 홀로도모르로 수백만이 죽어가던 시기 소련의 현 러시아 지역에서도 잔혹한 정권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마을, 수용소, 전쟁터에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러시아에는 ‘푸틴의 얼굴을 하지 않은’ 러시아인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당연한 사실이야말로 희망의 씨앗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푸틴이 우크라이나 수도 진격을 결정하자 러시아인들은 반전을 외치며 광장에 모였습니다. 1000명이 넘는 러시아인들이 우크라이나 침공을 반대하다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아들의 참전 소식, 전쟁포로가 되었다는 사실을 방송을 통해서야 알게 된 어느 러시아 어머니는 “내 아이를 되찾으려면 누구의 문을 두드려야 하나요?”라고 말하며 눈물 흘렸습니다.( 링크 ) 아나스타샤 에델은 지난달 뉴욕타임즈에 “나는 러시아인이고 내 가족은 우크라이나인입니다. 전쟁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되죠?”란 제목의 칼럼( 링크 )을 썼습니다. 그리고 한 러시아군 병사는 절망적으로 말합니다.( 링크 )

“누굴 쏴야 할지 모르겠어. 다 우리처럼 보인다.”

역사는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대부분의 ‘작은 사람들’에게 있어 승패나 대의보다 더 큰 문제는 전쟁과 폭정 그 자체였습니다.

오늘 레터는 17년간 ‘화덕 없는 아우슈비츠’라 불렸던 콜리마 수용소에서 지내다 가까스로 생존해 귀환한 러시아 작가 바를람 샬라모프의 소설 속 한 대목으로 끝맺어보려 합니다.

탕, 하고 건조한 총소리가 울리자 리바코프는 작은 언덕 사이에 얼굴을 박고 엎드렸다. 세로샤프카가 라이플을 흔들며 소리쳤다. “거기 있어, 이쪽으로 오지 말고!” 세로샤프카는 노리쇠를 당겨 다시 한번 발사했다. 우리는 이 두번째 발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세로샤프카도 알았다. 두발을 쏘도록 되어있다. 첫발은 경고 사격이다. 리바코프는 작은 언덕 사이에 갑자기 조그맣게 누워 있었다. 하늘과 산과 강은 거대했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작은 언덕 사이의 오솔길을 따라 이 산속에 누울 수 있는지 신은 안다. -바를람 샬라모프, <콜리마 이야기>

 

 

 

[인스피아]깊게 본 우크라이나 비극과 극복의 역사…기아학살, 수용소, 부정부패 (khan.co.kr)

 

[인스피아]깊게 본 우크라이나 비극과 극복의 역사…기아학살, 수용소, 부정부패

※경향신문의 인문교양 뉴스레터 인스피아(링크) 3월 2일자에 게재된 글입니다. 뉴스레...

m.khan.co.kr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