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산업은 독기와, 그 독기로 이뤄내는 성장을 사랑한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판매한다. 온갖 오디션 프로그램에는 반드시 ‘처음에는 조금 부족했지만, 노력을 통해 성장하는 캐릭터’가 등장하며, 인기 멤버로 등극하여 데뷔에 성공한다. 성장은 아이돌이 팬들에게 사랑과 진정성을 증명하는 증표이기도 하다. 거의 모든 아이돌이 ‘더 열심히 하겠다’, ‘더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 ‘더 발전하는 ○○○가 되겠다’고 약속한다. 성장이라는 두 글자에는 많은 것이 포함된다. ‘더’ 많아진 인기, ‘더’ 늘어난 음반 판매량, ‘더’ 날씬해진 몸, ‘더’ 어려진 얼굴, ‘더’ 숙련된 춤과 노래, ‘더’ 늘어난 연습량, ‘더’ 자주 하는 팬들과의 소통, 더, 더, 더…. 현재에 안주하거나 만족하면 안 되고, 이전보다 기량이 떨어지면 더더욱 안 된다. 성장을 향한 욕망은 누가 시킨다고 하는 게 아니다. (물론 소속사의 지시와 압박도 있겠지만) 자발적으로 한다. 그게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니까. 더 나은 삶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이니까.
한병철은 <피로사회>(문학과 지성사, 2012)에서 20세기까지는 규율사회가 “~을 해서는 안 된다”, “~을 해야 한다”를 내세웠다면 21세기 이후는 성과사회가 ‘당신은 뭐든지 할 수 있다’를 내세운다고 분석했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긍정의 과잉’은 달콤하다. 개인은 자발성과 자유라는 광야에서 달릴 수 있다. 한계는 없다. 내가 하고자 하면 할 수 있다는 믿음은 결국, 내가 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하고자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군사독재 시절 유통되었던 ‘하면 된다’ 정신의 변주 같다.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자발성과 가능성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는 모든 문제의 원인과 해결 방식을 개인의 차원으로 떠넘기고, 결과에 대한 자기 책임을 강조한다. 익숙한 버전이 있다. “가난한 사람은 게으르기 때문”, “뚱뚱한 사람은 자기 관리를 못하는 것”, 이런 혐오 발언은 빈곤에 대한 구조적 고찰이나 비만의 사회적·유전 이해가 쏙 빠지고 개인을 비난하는 과녁만 남기는 대표적인 자기 계발과 성장 담론의 사례다. 이 프레임에서 성장을 목표로 변화하지 않는 것은 게으름이고, 태만이고, 나태하고, 한심하며,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는 나를 방치하는 자기 학대다. K팝은 나이 들고 기량이 떨어지거나 외모가 달라지면, 즉 ‘퇴보’하는 듯 보이면 즉각 퇴출당하는 세계이다. 그리고 신제품 출시처럼 인간에게도 매번 새로움을 요구한다. 그래서 더더욱 성장 이외의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햄릿은 외쳤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2022년, K팝 아이돌은 외친다. “죽느냐, 성장하느냐. 답은 정해져 있다.” 잠을 못 자고 식사를 못하더라도,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연습은 쉬면 안 된다. 더 새롭고 나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 대번에 초심을 잃었다거나 돈 벌기 싫냐는 비난이 쏟아진다. 탈진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다.
더 발전해야 한다는 내면의 자기 요구는 외부의 강요보다 훨씬 힘이 세고 저항하기 힘들다. 복어는 자기 독 때문에 죽지 않는데, 인간의 내면에 잔뜩 벼려진 독기는 성장을 위해 자신을 몰아붙이다 천천히 갉아먹는다. 아이돌을 예로 들었지만, 누구나 자기 계발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린다. 정해진 업무 외에도 경제나 외국어 공부를 하고, 철저한 관리로 탄탄한 몸과 높은 자존감을 가져야 하며, 아침 일찍 일어나 나만을 위한 시간이라도 가져야 한다. 쉬는 것도 생산과 발전을 위해 배치된다. 그런데 인간은 퀘스트를 수행하고 열심히 키우면 단계적으로 레벨 업되는(수준이 올라가는) 게임 캐릭터가 아니다. 강철 검이 아니기에 몸과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영생의 존재가 아니기에 신체적으로 가장 왕성할 나이의 전성기가 지나면 자연스럽게 기량이 하락하며, 프로그래밍된 사물이 아니기에 어제 잘한 것을 오늘 못할 수도 있다. 인간의 몸과 정신은 소모품이고 삶은 죽기 직전까지 상승 곡선을 그리는 그래프가 아니다. 성장이 더디거나 없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성장하려면 에너지가 필요한데 이것은 사람에게 무궁무진하지 않음을 받아들이자는 말이다. 모두가 모든 순간에 전력투구하며 눈에 보이는 변화를 일으킬 수는 없으며 이는 당연하다.
재가 될 때까지 하얗게 불태우지 않고, 굳이 가장 높은 곳에 자기를 데려가려 애쓰지 않으면서 어떻게 개별적 존재가 다채롭게 빛날 수 있을까? 불가능해 보이지만 반드시 성찰해봐야 할 문제다. 경쟁과 성과를 중시하는 사회구조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꼭 필요하지만 다소 아득하게 들릴 수도 있겠다. 다양한 존재의 방식을 가시화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가수 아이유는 “언니는 힘들 때 어떻게 이겨내나요?”라고 쓴 글에 “가끔 져요…”라고 댓글을 달았는데, 이는 아이유의 대표적인 명언으로 꼽히며 자주 회자되었다. ‘힘든 것은 이겨내야 한다’는 당위를 뒤집으며 신선한 충격을 주기 때문이다. 아이유는 신인 시절 대표가 “프로는 재미있으면 안 되고, 항상 괴로워야 한다”고 했지만, 자신은 “괴로운 프로라면 그냥 아마추어로 남고 싶다”고 말한 적도 있다.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작은 가능성을 씨앗처럼 툭 던져두면 무엇이 싹틀지 모른다. <젊은 ADHD의 슬픔>(민음사, 2021)을 쓴 정지음 작가는 트위터에 이런 글을 남겼다. “ADHD 진단 후 내 삶의 목표는 ‘완전히 멀쩡해지기’가 아니라 ‘예측 가능한 혼란을 만들기’가 되었다. 내가 뭘 하든 늘 어느 정도는 혼란스러우리란 사실을 인정하고 걍 생긴 대로 사는 것이 내겐 오히려 자기 통제다.” ‘완전히 멀쩡해지기’가 세상이 요구하는 성장이라면, 본인이 거기에 맞춤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자기만의 목표를 정한 것이다. 가능한 범위를 인지하고, ‘해도 안 되는’ 것이 있음을 인정할 때 기준은 ‘성장’에서 고유한 ‘영역’으로 바뀐다. 성장은 멋진 것이지만, 상승과 전진이 변화의 유일한 방향은 아니다.
BTS의 성공 뒤에 자신을 갈아 넣은 멤버들..경쟁과 성과만을 강요하는 K팝의 산업 구조[이진송의 아니 근데] (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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